626호

인간 사회 갈등·대립으로
시끄러운 속세 바로 잡으려면
비난의 화살 자신에 돌려야

한국불교의 1700여 년 흐름 속에는 숱한 위인들의 숨결이 담겨 있다.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는 분들은 대개 불교의 완성, 성불을 이룩한 분들인 경우가 많다. 대체로 부처님, 보살님, 큰스님 하면 먼저 연상되는 것이 근엄함, 카리스마, 엄숙함 등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분들에게는 언제나 유머와 따뜻함, 친근감 넘치는 인간미가 앞서있었다고 생각한다.

충담(忠談) 스님은 신라 경덕왕 때의 인물이다. 우연히 경덕왕의 부름을 받았고, 당시의 태평성세를 기리는 안민가(安民歌)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안민가라는 향가의 마지막 노랫말이 인상적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인간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다시 말해서 분수를 넘어설 때부터 비롯된다. 가정 불화의 원인은 가장이 가장답지 못하고 술이나 노름에 빠지거나 곁눈질하느라고 집안 돌보는 일을 팽개치기 때문이다. 아내가 참을 인()’자 대신에 나는 못 하리.’하는 오기를 부릴 때 그 가정은 무너진다. 그들의 불만은 가족을 넘어 사회에까지 미치게 되고, 이 악순환의 윤회가 현대 선진사회를 물들여가고 있다.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인은 조국 수호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사업을 하는 이들은 탈세 궁리보다는 정직하고 투명한 회사 운영에 몰두해야 한다. 교수가 공부는 안 하고 정치판이나 기웃거리는 행위 또한 불행한 일이다. 스님들은 수행이 근본 목표여야 한다. 섣불리 CEO가 되려는 꿈을 가지면 불교의 세속화는 피할 수가 없다.

충담 스님의 이 평범한 노랫말을 나는 화엄적 가치관이라고 생각해 왔다. 육상원융(六相圓融)의 현실적 응용이라고 해석해 본 것이다. 불교의 논리는 복합적이고 다중적(多重的)이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려는 일부의 그릇된 견해는 이 불교적 고등문법을 단세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이다. ()을 유학자들은 허무로 인식했다. 그래서 불교를 출세간적인 종교로 매도하는 허무맹랑한 작태를 저질렀다. 그러나 불교의 공은 결코 허무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영원할 수 없다는 면에서 보면 분명 공은 무()이다. 그러나 공을 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의 본래 뜻을 왜곡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비영원성을 말하는 공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할진대 그 공이라는 생각도 공이어야 한다. 공공(空空), 즉 변증법적 부정을 통해 절대긍정에 이르는 길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동시에 충담 스님의 노래 속에는 남을 탓하는 원망스러움이 없다.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은 나의 문제일 뿐 다른 이를 원망할 수 없다는 배려의식이 깃들어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를 보자. 노사분규의 현장에서는 남의 탓만 할 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은 전무하다. 빈부갈등을 보라. 가진 자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 속에는 자비와 배려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가진 자는 덩달아 더 가지려 하고, 더 가진 자는 뺏기지 않으려 한다.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은 타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불교는 타인에 대한 적개심이 스스로를 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끄러운 사바세계를 바로잡으려면 모든 비난의 화살은 스스로에게 돌려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겸손과 용서가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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