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통해 겸손 배우며
‘순간’에 충실하고
새해, 보살도 실천하자

고대 인도의 신화에는 자연과 우주창조의 신비에 관한 여러 상상력이 집약되어 있다. 리그·베다에는 최초의 신에 대한 사색, 그리고 다양한 여러 신들의 주재자, 즉 신 중의 신에 대한 놀라운 해석도 있다. 그러나 고대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유일자에 대해서 심각한 모순을 발견한다. “모든 신이 천지창조 이후에 태어났다면 그 유일자를 창조한 이는 누구인가?” 이 근원적 회의는 모든 신이 자연현상 속에 스며 있다는 범신론으로 발전한다. “그는 알리라. 모든 것을 창조한 유일자는……. 그러나 어쩌면 그 또한 모르리라.” 이 다양한 범신론의 주체는 불·공기·물·새벽·자아 등으로 묘사되는데, 그 가운데 ‘시간’이 절대신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시간은 일곱 필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달린다. 그 수레의 바퀴살도 일곱이다.” 이 7이라는 상징적 숫자는 ‘일주일’이라는 단위도 되고, ‘도레미’로 나타내는 음계도 된다. 불교에서도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이다. 49재는 7의 7배수이다. 시간을 노래한 고대 시인들의 찬가를 카알라 찬가라고 말한다. 인도말 카알라는 시간을 의미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무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이 무상의 실존은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사법인(四法印)의 법문으로 표현된다. 이 무상은 삶의 진실이지만, 동시에 허무의 냄새도 짙다. 이 허무의 원인은 현실을 외면하고 영원해야 한다는 이기심 때문에 빚어진다. 불편하지만 이 고독이야말로 삶의 진실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시간 속을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객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모든 생명에게 각기 다르게 적용될 수 밖에 없다. 한 시간은 60분이지만, 그 처해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찌는 듯한 여름철에 겨울옷을 껴입고, 제일 싫어하는 이와 마주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또 한편으로는 시원한 물가에서 얼음주스를 마시면서 가장 좋아하는 이와 한때를 보낸다고 가정하자. 앞의 한 시간은 죽음처럼 견디기 힘든 시간이겠지만, 뒤의 한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는 듯 느끼지 않겠는가. 우리가 일생 동안 보내온 시간을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마찬가지이다. 젊었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촌음을 아끼며 살았다. 남들은 교수를 한가한 직업처럼 볼 지 몰라도 강의·연구논문 등의 스트레스만 해도 엄청나다. 알아야 할 정보가 넘쳐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엄청난 공부를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공직에서 은퇴하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있는 지금은 하루 하루의 삶이 공허하고 지루하기만 하다.

따라서 시간 앞에 모든 이들은 겸손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이 순간은 우리들 인생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분한 삶을 가치롭게 가꾸려면 주어진 ‘순간’에 충실해야 하고, 공부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하고, 비즈니스에도 적당히 대처해서는 안되고, 놀 때도 열심히 놀아야 한다. 그 길만이 인생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이다. 성공한 인생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백두산만큼 돈을 모은 것도 아니다.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 번뇌 또한 더욱 무거워지기 때문에 성공한 인생이란 ‘열심히 살아온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겸손을 겸비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제 또 미지의 새해가 펼쳐지고 있다. 계묘년 한 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보살의 기개가 깃들고, 그 실천의 보람이 널리 퍼지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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