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부정은 삶 본질 왜곡
‘나’는 생사 되풀이 하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영혼은 있고 윤회는 없다?’ 최근 신문에 난 책 광고의 문구이다. 승려복장을 한 이가 쓴 책이라는데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말세라지만, 이 경우는 도가 지나치다. 물론 불자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자라면 지녀야할 최소한의 가치 기준이 ‘나’라는 인격의 자성은 공(空)이며, 나는 끊임없이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는 윤회의 존재라는 점이다. 이것이 백일하에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든다. 경주돌이라고 다 옥돌은 아니겠지만, 이것은 명백한 훼불행위이다.

영혼이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규정짓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영혼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가장 근접한 개념이 ‘아트만(Atman)’이다. 흔히 자아(自我)라고 번역되지만, 몸은 죽어도 그 아트만은 영원하다는 것이 당시 인도종교의 공통적 인식이다. 그래서 그 영원한 자아를 깨우치고, 그 결과 합일(合一)하는 것이 해탈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와 같은 영원한 실재(實在)를 부정하였다. 삼법인에서 설파하신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바로 영혼의 실재에 대한 직접적 부정이다.

윤회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한 교리이다. 윤회라는 번역어는 ‘삼사라(Samsara)’라는 인도말에서 유래되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끝없이 윤회유전이 거듭된다는 학설이다. 인도의 현자들은 모든 생명을 윤회의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제기된다.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세계를 ‘야마(Yama)’라고 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그대로 소리나는대로 ‘염라’라고 번역한다.

인도의 종교인들은 야마의 세계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재사(再死)의 교리를 제시한다. 따라서 생명의 윤회는 가장 합리적인 삶의 해석이다. 불교는 이 윤회사상을 받아들였지만 독특한 육도윤회의 가르침으로 승화시켰다. 지옥·아귀·축생·수라·인·천으로 분류되는 여섯 갈래의 길은 각자의 카르마(Karma), 즉 업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간은 죽은 후 7주 동안 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겪는다.

해탈이라는 말은 ‘…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라는 표현을 쓴다. 죽어서 한 번만 다시 태어나는 성자, 그 이후에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이’라는 최고의 경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전생의 업보가 금생을 결정한다면, 당연히 금생의 업보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영혼의 영원성, 그 신성불가침을 말하는 이들은 외도의 편견에 빠져 있는 이들이다. 윤회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이들 또한 삶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불행한 생명일 따름이다.

오늘의 시대를 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부른다. 보다 정확하게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압박감으로까지 발전해 가고 있다. 불교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지 말고, 오늘의 문제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일 뿐이다. 불교가 건강해져야 내가 살 수 있고, 나라가 튼튼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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