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개인 깨달음만으로
이상적 세계 실현 불가능
새 불교공동체 일으켜야

삼보의 하나인 승(僧)은 상가(Sangha)’의 음역이며, ‘화합대중(和合大衆)을 뜻한다. 이런 뜻을 생각해볼 때 지금 행해지는 한글 삼귀의례의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는 본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스님들’이라는 표현은 개개인 스님의 집합일 뿐이며, 거기에 공동체 또는 단체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개개인에 대한 귀의가 되면 여러 문제가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님들에 대한 비판이 바로 승보에 대한 훼방으로 여겨지는 점이다.  

스님들은 재가자들에게 모든 생활을 의존하기에, 오히려 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 코삼비 지역의 스님들이 심한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자 재가자들이 공양을 완전히 끊어버린 일이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지금의 이상적인 승단을 꾸려가는 데도 큰 시사를 줄 수 있다. 적어도 개개인 스님들의 불화가 그 스님들의 추종자까지 가세하는 큰 불화로 번지는 예는 없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든 것은 스님들에 대한 비판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라는 본디 의의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공동체 또는 단체라는 의미가 제대로 부각되면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 수행공동체 또는 사부대중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엄하게 배제된다.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계율이 제대로 지켜지면 출가공동체는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상이 될 수 있다. 또한 그 확장이라 할 수 있는 사부대중의 공동체가 출가공동체의 모범을 본받아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이상적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삼귀의의 의미 또한 대단히 조화로운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공동체의 확산, 확장이 바로 불국토 건설의 과정이 되기에 개인의 깨달음에만 치중해 사회적 구현의 취약성을 보이던 불교의 면모를 일신할 수도 있다.

개개인의 깨달음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환경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한 개인이 생명존중 사상을 지니고, 지나친 소비를 억제하며,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바탕한 욕망의 무조건적인 충족을 부추기는 흐름에 저항할 수 있을까? 큰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며, 그것을 커다란 흐름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적인 유대가 필수적이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운동, 그것이 바로 불국토 건설의 길이다. 관념 차원의 불국토 건설을 지금 여기 우리의 실천으로 가져오는 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 현실의 불교 공동체를 조명해 보자. 사찰공동체, 신행공동체의 현황은 어떤가를 점검해 보자. 우선 과연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의 불교공동체가 얼마나 있는지, 새로운 공동체 운동은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과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목표인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의식구조가 여전히 존재하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불교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현실화시켜야 한다. 공동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개인의 안심입명도 없다는 확고한 인식 아래 불교 공동체 운동의 큰 흐름을 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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